이 글은 우리 사회 표현의 자유와 소통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을 정리한 일기입니다.
인터넷 논객 미네르바(개인적으로 '미네르바 = 박대성' 공식의 성립은 모르겠으나 '미네할배 ≠ 박대성'의 공식은 확실하다고 믿는 1人입니다만) 구속수사로부터 비롯된 표현의 자유와 지난 해 미국산 쇠고기파동 정국 당시 광화문 네거리에서 만났던 명박산성에 이어 이번에는 시청광장을 국민들이 낸 세금으로 구입한 전경버스로 빙 둘러 막아버려 푸른 서울시청 광장을 섬으로 만들어 버린 MB정권의 국민들과의 소통부재에 대해 생각하면서 작성하는 글 입니다.
2009.05.23 이후의 나의 삶
최초작성 : 2009/06/01 00:26
별 볼일 없는 내용이지만 이 글은 일기형식으로 노무현 대통령의 49재까지 이어질 예정이다.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지 않으면 생활 자체가 어려울 것 같기에 한번 쯤 꼭 정리하고 넘어가야겠다 다짐하며 조금씩 정리하던 조각들을 하나하나 이어본다.
(이 글을 접하시는 분들께 한 말씀드린다면, 5월 29일부터 작성하기 시작했으나 게으르고 머릿속의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이었던지라 비공개로 설정해두었고, 5월 30일, 6월 1일 작성한 내용과 그 이후에 틈틈히 작성한 내용이기에 글의 시제가 좀 어색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일기인 관계로 1인칭 주인공 시점이며 존댓말이 아닙니다. 양해를 구합니다. 사진은 저의 핸드폰 SPH-M4500으로 찍은 것이라 그리 좋은 화질이 아닙니다)
2009.05.29에 만난 사람들
2009년 5월 29일...
노무현 대통령님을 보내드리는 마지막 순간 가까이에 있고 싶었다.
월드컵의 열기가 채 식기도 전인 2002년 12월 19일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에 당선된 노무현 당선자를 가까이에서 뵙고 싶어 광화문 네거리에서 환호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 소식으로 요 며칠 필자의 머릿속은 뒤엉켜있는 실타래마냥 어지러웠다.
그 실타래를 제대로 풀기 위해서는 29일 노무현 대통령을 배웅해드리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라 여겨졌고, 바삐 움직였다.
전날 유시민 전 장관의 글을 접했지만 나에게는 노란 넥타이가 없어 일단은 저 얄미운 세력들이 목에 맸을 검정 넥타이를 맸다.
검쟁색 바지에 하얀 와이셔츠를 입고 며칠 전 조계사 갈때 꽃집에서 만들어 매일같이 옷 바꿔 입을 때마다 계속 착용했던 검정 리본을 가슴에 달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버스를 탔으나 몇 정거장 가지 않아 내려야 했다. 일찍부터 교통은 통제되고 있었으며 경찰청 앞에서부터 시청까지 걸어갔다.
경복궁 안에는 못들어갈지라도 광화문 앞까지는 가고 싶었다. 그러나 그 또한 여의치 않아 시청광장으로 발길을 돌렸다.
경복궁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새벽부터 움직일 것이라던 아직 완치되지 않은 아픈 몸 이끌고 경복궁으로 향했다는 오랜 친구는 광화문 출입을 통제하며 초대장이 없는 일반인들을 막고 있다며 분명 자기는 광화문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뉴스를 접했는데 경찰이 막는다며 분해하고 있었다.
시청에는 이미 많은 인파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노란 천과, 햇빛가리개 모자,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의 이미지가 그려져있는 도화지 크기의 두꺼운 종이로 인쇄된 추모 인쇄물을 나눠주고 있었다. 모두가 노란 물결이었다. 이 외에도 시민광장에서 제작한 것으로 보이는 인쇄물과 경향과 한겨레 등의 신문들, 조중동 끊자는 스티커 등 짧은 시간에 많이 준비한 그네들의 노고에 부끄러웠다.
이 기다림 과정에서 지방에서 올라왔다는 여대생으로 보이는 분과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또 다른 여성분과 대화하고 있는데 그 대화에 필자가 끼어든 것이다.
같은 동향 사람인데 새벽에 고속버스 타고 올라왔다는 말을 전해들었다. 왠지 고마운 마음에 다시 고향으로 내려갈 때까지 챙겨드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꽤 오랜 시간 기다려서 하늘로 날아갈 수 있는 풍선을 하나 받았다.
노제를 진행할 무대가 마련되어있는 곳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이동하고 있었고 우리는 그렇게 일행이 되어 사람들 속에 함께 하게 되었다. 많은 이들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후 하나 둘 앉았고 노래를 부르는 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당시 대한문쪽에서 별도의 목소리가 있었는데 그 분들은 그곳에서 따로 노제를 진행했다는 인터넷에 올라온 기사를 접하고 나서야 왜 그쪽에서 사람들 소리가 컸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민주주의를 지켜내기 위해 애쓰시는 그 분들이 있었기에 시청광장이 개방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자리를 빌어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말을 전한다. 광화문부터 서울역까지 노무현 대통령의 마지막을 지켜보기 위해 빽빽하게 들어선 많은 시민들로인해 온 도로가 노란 물결을 이루고 있었다.
2002년 월드컵 당시의 서울 중심가가 축제의 한바탕이었다면 영결식날은 추모의 물결로 가득한 모습을 보였다.
노제는 김명곤 감독이 총지휘했고 추모공연의 사회는 김제동이 맡았다.
김제동이 사회보며 했던 말들이 아마도 국민들 마음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이날 안치환, YB(윤도현 밴드), 양희은 등의 가수들이 노무현 대통령을 떠나보내는 노래를 불렀다.
노래패 '우리나라'의 '다시 광화문에서'는 카페에서 자주 듣던 곡이었는데 노무현 대통령님 서거로 우리 국민들의 지향점이 어디인지를 새삼 일깨워주는 곡이었다.
YB의 '너를 떠나보내고'를 따라부르며 이제 노래방에서 이 곡을 부를 때면 떠오르는 얼굴이 한 분 더 늘어날 듯 하다.
2002년 대선에서 CF를 통해 노무현 대통령이 좋아하는 곡이었음을 알게 된 양희은의 '상록수'를 들을 땐 나의 무능에 눈물만 흘렸다.
추모 공연이후 운구차가 도착하였고 순간 시청광장은 모두가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과 지켜드리지 못한 죄송함 그리고 명복을 비는 마음으로 한마음이 되었다. 이때 필자도 눈물을 좀 흘렀다. 좀 더 가까이 다가가 지켜보고 싶은 마음에 앉았던 이들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이내 질서정연하게 대열이 정비되었다.
진행된 노제는 국립창극단의 ‘혼맞이 소리’, 국립무용단의 ‘진혼무’, 안도현·김진경 시인의 조시 낭독, 안숙선 명창의 조창, 묵념, 고인의 유언 낭독 등 순으로 진행되었고, 특히 안도현 시인의 '고마워요 미안해요 일어나요' 弔詩 낭독을 들으면서 우리 사회의 가증스런 세력들에 다시 한번 분노했다.
문성근의 유언 낭독 때 많은 이들의 슬픈 흐느낌을 느꼈다.
개인적으로 의문사(타살 내지는 방조된 자살)라고 단정짓고 있었던지라 이 유언 역시 노짱이 작성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한편으로 하고 있지만, '떠난 님의 마음이 살아 생전에 어느 정도 낭독되는 유언의 내용과 들어맞는다면?' 하는 생각에 이르자 머리 숙여졌다.
모두가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 고마운 마음과 미안한 마음으로 함께 하는 시간이었다.
노제가 끝나고 운구차가 서울역 방향으로 향할 때 꼼짝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했다.
도무지 만장행렬의 끝을 예측할 수가 없었다.
명동까지 만장행렬이 이어져 있다는 말을 들었다.
만장행렬 맨 뒤에 따라가려던 동향 여대생과 필자는 어쩔 수 없이 시청 앞에서 서울역으로 향하는 만장 행렬이 한창일 때 인산인해를 이룬 인파를 뚫고 겨우 서울역 방향으로 천천히 걸어갈 수 있었다.
YTN에서 꽃가루를 대신하여 종이가루를 날려주고 있었다. 고마운 그네들의 모습을 보며 사람들은 'YTN 힘내세요' 라고 외치고 있었다. 회현 고가도로에도 많은 이들이 노무현 대통령의 마지막을 지켜보기 위해 운집해있었다.
더디게 움직였던 운구차를 뒤따르던 만장을 들고 바삐 뛰던 사람들도 어느 새 서울역앞에 도착해있었고, 그 뒤를 잇는 수많은 시민 행렬은 서울역앞 도로쪽 공사로 인해 두 갈래로 나위어졌다. 운구차량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고 잠시 남대문경찰서 화장실과 매점을 이용했고, 봉하마을에서 마을사람들을 태우고 올라온 버스들은 서울역에서 후암삼거리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를 했다.
이른 아침 고속버스를 타기 위해 바삐 움직이느라 한끼도 못했다는 고향 여대생을 그냥 보내기 뭐해서 밥 한끼 대접하려고 쏘렌토음식점에 들어갔다. 친구놈에게 이 사실을 말했다면 욕을 얻어 먹었을지도 모르겠다. '영결식날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든?' 이리 구박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멀리서 새벽부터 잠 설치며 올라와 아무것도 먹지 않고 그저 물만 먹은 고향 사람을 보니 마음이 짠해져서 그냥 보낼 수는 없었다. 그런데 우습게도 계산은 여대생이 선수치는 바람에 우스운 꼴이 되고 말았다. 차비하라고 돈을 주기도 뭐하고 해서 다음에 고향 내려가면 밥 한끼 대접하겠다는 약속을 한 후 떠나보냈다.
그 때가 오후 4시..
나에게 허락된 시간은 앞으로도 2시간이 남아있었다.
시청광장에서 자리를 지키겠다며 함께 있던 다른 여성분이 있는 곳으로 갈까 생각도 해보았지만 그래봐야 한시간도 안되는 시간일 것 같아 그냥 말았다.
고속버스 타기 위해 지하철로 향하는 모습을 본 후 반대편 출구로 나와서 호프집 앞에 놓여 있던 의자에 앉아 담배 한 개비를 피워 물었다. 슬픈 마음을 위로받기 위해 친구놈에게 전화했다. 사무실에 얽매여 있는 몸인지라 참석하지 못해 아쉬워 하는 마음이 그대로 느껴졌다. 서로 위로를 주고 받았다. 전화통화를 끝내고 담배가 거의 다 타들어갈 무렵 옆쪽에 앉아서 생맥주를 마시고 있던 5명의 독특한 구성원에 눈이 갔다. 50대후반에서 60대 초반으로 보이는 세 분의 남자분들과 30대로 보이는 여성 2명, 왠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구성원이 술자리를 함께 하며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담배를 다 피운 후 옆으로 다가가 말했다. '저 어르신 실례가 안된다면 합석해도 되겠습니까?' 50대 후반으로 보이는 한 분이 흔쾌히 의자에 앉으라고 권하셨다. 그곳에는 이 분보다 후배되는 올해 57세로 5.18당시 시민군이었고 노무현 대통령 선거대책본부 홍보부위원장을 하셨다는 분과 60대 초반으로 보이는 부동산중개업을 하시는 분이 함께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이하 이 글에서의 호칭은 아저씨로 통일)
그리고 32세 여성과 34세 여성 이렇게 필자를 포함 6명이 노무현에 대한 얘기를 진행했다. 재미있는 사실은 50대 후반에서 60대 초반의 아저씨들이 우리나라의 현상황에 대해 우리들보다 더 분개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 만큼 현 시국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했다. 32세 여성분은 먼저 자리를 떠서 많은 얘기를 나누지 못했다.
34세 여성분은 뮤직비디오 조감독을 하시는 분이었는데 이 분은 조중동이 뭔지 작년에서야 알았다는 소위 말하는 보수층 집안의 딸이었다. 아버지와는 정치적인 대화가 전혀 되지 않는다며 자신의 가슴팍을 계속 두들기고 있었다. 자신의 무지가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를 있게 했다며 자책하는 모습엔 진정성이 있어 보였다. 하지만 역사에 대해서는 너무도 모르는 듯 했다. 왜 이러한 시국이 왔는가에 대한 깊이있는 성찰이 아쉬웠다.
명함이 독특했던 시민군 출신의 아저씨는 그곳 술자리에서의 말씀이나 김만수 전 참여정부 대변인으로부터 온 문자를 보여준 것으로 보아 그 분의 경력이 거짓이라 여겨지진 않았다.
세 분은 모두 정치적 동지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부동산 중개업 아저씨는 필자가 무척 마음에 들었나보다. 맨 마지막까지 그 분과 단 둘이 남아 많은 얘기를 나눴다. 부동산 중개업 아저씨는 운구차량이 오래토록 용산역 앞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고 있다는 전화를 받고 있었다. 보내지 말고 더 붙잡아 둬야 한다며 통화를 끝마치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봤다.
시간이 흐르고 다시 술을 더 시키기 위해 호프집 안으로 들어갔을 때,
6시 30분 내부에 설치된 TV에선 화장하기 위해 화로에 들어가기 직전의 모습이 생중계되고 있었다. 눈물이 쏟아졌다.
차마 볼 수가 없었다.
기다리고 있던 분들도 있고 해서 술을 가지고 밖으로 나와 연신 퍼마셨다.
필자는 그 동안 광주분들을 대할 때면 언제나 빚지고 있다는 느낌이 강했는데, 호프집에서 밖으로 탁자와 의자를 내놓음으로써 만들어진 이 술자리에서 조금은 그 빚을 만회한 기분이어서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술을 가져올 때마다 선불 계산하는 방식이었던지라 계속 돈을 지불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다행히도 아저씨들께서 오해하지 않았다. 부동산 중개업 아저씨는 필자의 핸드폰으로 동영상도 찍었다. 원래는 사진을 찍으려 했는데 사진 찍을 때 사용하는 버튼이 술기운에 길게 눌러졌나보다.
이 술자리에서 빨리 마시고 6시까지 귀가해야 했던지라 급히 마신 바람에 취기는 빨리 올라왔고 7시가 넘어서야 귀가하는 바람에 불필요한 오해를 받기도 했다. 그리고 바로 잠들어버렸다.
2009년 5월 29일은 그렇게 마무리 되었다.
의식있는 이들은 영결식이 끝난 후 시청광장으로 다시 모여 그 자리를 지키려 노력하는데 필자는 술에 취해 잠들어 버린 것이다.
계속 이어서 쓸 예정입니다.
앞으로 전개될 대한민국의 6월
2009년 6월 5일
건대입구역 앞에 내걸린 현수막
향후 대한민국의 6월은 진보와 보수간 이념논쟁이 더 격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추모하는 사람 있음에...
2009년 6월 9일
추모하는 시민이 있기에 대한문 앞 시민 분향소는 계속 이어진다.
용산참사 희생자들은 아직도 구천을 떠돌고 있다.
2009년 6월 10일 용산참사현장 앞
정부가 용산참사 유가족들과 마음을 터놓고 한번만 대화했더라도 이처럼 오래토록 장례를 못치르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법을 좋아하는 MB정권이지만 소통을 모르는지라 그네들은 국민들의 아픔 마음을 따스하게 어루만져주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삼가 고인들의 명복을 빈다.
108배
2009년 6월 17일 조계사
조계사 일주문 앞에선 운하백지화국민행동'은 정부의 4개강 삽질을 멈추라는 시위를 하고 있었다.
서명하고 모금함에 지폐 한장 넣고 곧바로 극락전으로 향했다.
백팔배를 하고 시간에 쫓겨 바로 동대문으로 향했다.
노짱 흔적...
2009년 6월 19일 서초구 우면동
우면아파트상가 앞쪽에 걸린 현수막에는 한 태권도인과 악수하는 모습의 노짱의 모습이 보였다.
추가작성 : 2009/06/24 20:20
지난 번 대한문 시민 분향소에서 만나뵈었던 시민 상주단의 한 분이신 사진속의 저 어르신..
언론을 통해 접하는 모습은 언제나 저 검정색 양복을 착용한 모습으로 다정하고 포근한 느낌이었는데...
대한문에 자주 나오라는 말씀에 부응하지 못하는 처지를 생각하며 마음 무거웠는데...
보수단체와 중구청 공무원의 행태를 보니 대한민국이 너무도 암울하다.
[출처] http://media.daum.net/society/others/cluster_list.html?newsid=20090624092112627&clusterid=34513&clusternewsid=20090624195009440
추가작성 : 2009/06/25 19:04
올해로 59주년을 맞이하는 6·25 한국전쟁
종로에는 어르신들이 많았다.
노무현 대통령 서거이후 주중에 시간 나면 한번은 꼭 찾아가는 조계사..
대웅전은 들어가지 않는다. 대웅전 부처님께는 지나가는 길에 합장만 하고 곧바로 미륵 부처님이 계신 극락전으로 간다.
매주 금요일마다 시간 맞춰가면 더 좋겠지만 도저히 시간을 맞출 형편이 못되다보니 이렇게라도 떠난 님께서 좋은 곳으로 가셨으면 하는 바람을 부처님전에 빌 수 밖에 없다.
일주문 바로 아래에선 '정조대왕 효행유적지 보존 범국민연합' 회원들이 주택공사가 경기도 화성 정조대왕의 효행유적지내 대형 아파트 단지를 조성하는 것과 관련하여 반대 서명을 받고 있었다.
이번 달 초부터 시작한 것 같다. 지난 5월 23일 노무현 대통령 서거 이후 며칠 후에 찾아간 조계사에서는 보지 못했으나 영결식이후 찾아갔을 때는 서명을 했으니 4주째 서명을 받고 있는 것 같다.
이곳에서 받은 유인물에 의하면, 범국민연합이 추진하는 아파트 단지 조성 반대운동의 핵심은 정조의 처음 장지[初葬地]에 해당하는 곳이 개발지역에 포함되어 있다는 내용이었고, 추후에 초장지를 발견했다 하더라도 이는 우리 후손들이 사적지로 지정하여 보호해야 할 문화유산이기 때문에 개발지역에서 제외하라는 내용이었다.
(자세한 내용 : http://www.beopbo.com/article/view.php?Hid=61580&Hcate1=1&Hcate2=9)
지난 주부터 보이던 '운하백지화국민행동' 소속 회원들이 조계사 앞에서 오늘도 서명을 받고 있었다.
보아하니 천막도 설치되어 있고 꽤 많은 분들이 이 운동에 관심을 갖고 계신 듯 하다.
국가에서 추진하는 정책이 국민들의 뜻과 다른 길로 가면 거리로 나오는 국민들은 그 만큼 늘어난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지난 주에도 조계사 갔다가 서명하고 모금함에 지폐 한장 넣었는데...오늘도 보이기에 지폐 한장 넣었다.
(지갑이 얇아서 많이는 못넣었다... -.ㅡa)
27일에 서울광장에 나와달라고 하던데...주말에는 꼼짝할 수 없는 처지라서 아쉽다. 암튼 많은 분들 수고하고 계신다.
오늘 백팔배를 하면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더욱 더 활짝 꽃피고 국민들이 바라는대로 국가정책이 펼쳐지길 간절히 기도했다.
노무현 대통령 49재까지의 추모하는 마음을 잊지 않고 나의 영웅 노짱을 영원히 기억하고자 그를 위해 기도드리는 이 시간이 요즘 나의 일상에서 가장 행복하다.
대충 시간을 재어보니 15분 정도 소요되는 것 같았다. 예전 삼천배 할 때를 떠올려보면 정말 어설픈 행동과 마음 씀씀이다.
체력 또한 예전과 다름을 느낀다.
체력만이 변한 것은 아닌 듯 하다.
중도를 지향하는 필자가 점점 좌측으로 좌측으로 이동하려는 태도를 취하는 요즘의 모습은 분명 mb정권의 정책 추진에서 비롯된 것이다.
여기 저기 각종 시민단체들과 국민들이 들고 일어나는데도 '나몰라'라 하고 국민의 뜻과 정반대의 길을 추구하는 현 정권은 정말 국민을 두려워하지 않는 정부임에 틀림없다.
이란 사태를 보면서 우리나라도 저렇게까지 가지는 않아야 할텐데 하는 생각을 많이 하는 요즘이다.
이란 관련 보도를 접하면서 80년 5.18 당시의 사진들이 자꾸만 오버랩되는 것은 필자만의 느낌이 아닐 것이다.
'정신차려라! 실용정부야~'
요즘 광고로도 나오던데...
OOO야 도와줘~
'노짱님 도와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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